} }

조선을 사랑한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 - 2대에 걸친 헌신

 

1900년대 초 조선에서 활동한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와 한국인 의료진 및 맹인학교 학생들이 함께 촬영한 역사적 기념사진 via Canva and Gemini


프롤로그


1898년 5월 23일, 평양의 한 작은 집에서 이제 겨우 3살이 된 예쁜 딸 이디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4년 전 사랑하는 남편 윌리엄을 먼저 떠나보낸 후에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에게 남겨진 유일한 기쁨이었던 어린 딸의 죽음은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딸의 무덤 앞에서 그녀가 남긴 기도는 오늘날까지도 남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하나님, 이제 남은 내 아들 셔우드와 함께 한국에서 남은 사역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이것은 단순한 서원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스물 다섯살의 나이에 미지의 땅 조선에 홀로 와서 43년간 한국 여성의 의료와 교육을 위해서 헌신한 한 여성의 신념이 담긴 영혼의 기도였습니다.


스물 다섯살 처녀의 조선행 결심


운명을 바꾼 한 번의 연설

1865년 9월 19일 미국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로제타는 평범한 교사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것은 마리 라이온스(Mary Lyons) 라는 사람의 연설을 우연히 들었을 때 였습니다. 


"만일 당신이 남을 위해서 봉사하려고 한다면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는 곳에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을 하십시요."


이 한마디의 말은 그대로 청년 로제타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1889년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890년 미국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은둔의 나라'인 조선으로 떠났습니다.


첫 임무

1890년 두 달여의 긴 항해 끝에 부산으로 도착한 로제타가 맡은 첫 임무는 조선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녀관(현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2대 책임자 역할이었습니다. 조선의 현실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특히 로제타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극심한 남녀차별 속에서 존재감조차 없었던 조선 여성들의 처참한 현실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여성은 집에만 머물러야 하는 존재였고, 교육받을 권리도, 제대로 치료받을 권리도 없었습니다. 여성들은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는 것 자체를 금기시했고, 병이 생겨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죽어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로제타는 이런 조선 여성들을 향하여 깊은 긍휼한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화학당 학생 5명에게 의학 교육을 시작하며 조선 최초의 여의사를 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시작된 고난


운명적 만남과 결혼

1891년, 로제타의 인생에 캐나다 출신의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이 나타났습니다. 1892년 6월 서울에서 그와 결혼하고, 1893년 11월 첫 아들 셔우드 홀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들 부부의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윌리엄은 평양선교 책임자로 임명되어 곧 평양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고, 로제타는 서울에서 각각 의료사역을 해야 했습니다.


1894년, 운명의 해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윌리엄은 평양에서 수많은 전쟁 부상병들을 치료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역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었고, 겨우 서울로 돌아온 그는 로제타와 어린 셔우드의 손을 붙잡고 마지막 기도를 올린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은 34세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상심한 로제타는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캐나다에 있는 남편의 모교회를 방문했을 때, 남편을 닮은 어린 셔우드를 본 교우들이 눈물로 그들을 반겼습니다. 바로 그 순간, 로제타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엄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에 대한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그녀가 남긴 생생한 기록 - 일기장


1897년, 다시 조선으로

1897년, 로제타는 아들 셔우드와 미국에서 태어난 딸 이디스를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로제타는 25살에 한국에 온 이후로 매일 자신이 겪은 일들과 생각, 마음을 빠짐없이 글로 기록했습니다. 총 6권에 달하는 방대한 일기장은 그녀의 86년 인생 중 44년을 한국에 바친 생생한 기록이자, 구한말 조선의 귀한 역사서이기도 합니다.


1898년, 가장 절망적인 순간

1898년 5월 23일, 로제타에게 더 큰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 이디스가 '이질'이란 질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다시 깊은 절망 가운데 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로제타의 진정한 신앙의 힘이 드러났습니다. 딸의 무덤 앞에서 그녀는 좌절하는 대신 더욱 큰 사명감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딸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딸을 떠나 보낸후 한국 최초의 어린이 전문병원을 세우게 됩니다.



젊은 시절의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 초상사진, 1890년대 조선에 온 미국 여의사의 모습 via Canva and Gemini


한국 근대 의료 교육의 개척자


박에스더, 한국 최초의 여의사를 키우다

로제타의 큰 업적 중 하나는 박에스더(본명 김점동)한국 최초의 여의사로 키워낸 것입니다. 박에스더는 원래 이화학당 학생으로, 로제타의 통역을 도와주던 영리한 소녀였습니다. 로제타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미국 유학을 지원했습니다.

박에스더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사가 되어 평양 광혜여원에서 로제타와 함께 의료사역을 펼쳤습니다.


한국 최초의 맹아학교 설립

1898년, 로제타는 남편의 조수였던 오석영의 맹인 딸 오봉래를 받아들여 평양 부인병원에서 한국 최초의 맹인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로제타는 뉴욕 점자를 한국말에 맞게 개조하여 조선어 점자 교재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점자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조선 여성들만을 위한 의료 인프라 구축

로제타의 의료사업은 모두 조선 여성들만을 위한 전용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남성 의사에게 몸을 보일 수 없다는 유교적 관습 때문에 병으로 죽어가는 여성들을 위해, 그녀는 전국 곳곳에 여성 전용 병원들을 세웠습니다:


  • 보구녀관(현 이화여대 의료원) - 서울 최초 여성병원
  • 광혜여원 - 평양 여성 전문 치료시설
  • 동대문 부인병원(현 이화여대부속병원) - 서민 여성들을 위한 진료소
  • 제물포부인병원(현 인천기독병원, 1921년) - 인천 최초 여성병원

이와 함께 조선여자의학강습소(1928년, 고려대 의과대학의 전신)와 한국 최초의 간호사 양성학교(1903년)를 설립하여, 조선 여성들이 스스로 의료진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2대에 걸친 헌신


셔우드 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다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 홀(1893-1991)은 평양에서 태어난 "파란 눈의 조선 아이"였습니다. 아버지와 여동생을 일찍 잃은 셔우드는 어머니와 함께 의학의 길을 걸었습니다.

1926년 의료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돌아온 그는 해주 구세병원 원장으로 부임했고, 1928년 조선 최초의 결핵 요양소인 구세요양원을 설립했습니다. 특히 1932년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여 결핵 퇴치 운동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양화진에서 영원히 함께

로제타는 1935년 43년간의 한국 선교사역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1951년 86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을 때, 그녀의 유언은 명확했습니다:


"나를 남편과 딸이 묻혀 있는 한국에 묻어주세요"


그렇게 현재 양화진 제1묘역에는 홀 가족 6명이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홀 가족의 130년 역사(1860-1991)는 2대에 걸친 한국 사랑의 증명이었습니다.


    🎬 YouTube 에서 영상보기


다시 주목받는 로제타


사후 73년 만의 국가 인정

2024년 4월 5일, 로제타 셔우드 홀은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받았습니다. 사후 73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연극으로 되살아난 로제타의 삶


2023년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미국의 전설적인 실험극단 '리빙 시어터(The Living Theatre)'와 공동 제작한 연극 로제타가 첫선을 보였습니다. 이 작품의 특별한 점은 로제타가 직접 쓴 6권의 일기장을 바탕으로 연극이 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2025년 재공연 - 2025년 8월 23일부터 31일까지, 국립극단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의 공동기획으로 연극 《로제타 Rosetta》가 명동예술극장에서 재공연되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모든 사람이 똑같이 중요하다"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125년 전에 25세 미국 처녀가 미지의 땅에 와서 보여준 사랑과 헌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로제타는 구한말 조선에서 국적, 언어, 계층, 성별, 장애 등 모든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녀에게는 가난한 조선 여성도, 맹인 아이도, 존재감 없이 살아가던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소중했습니다.


  1.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는 곳에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을 하라" - 진정한 봉사정신
  2.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신념 - 역경을 이겨내는 의지
  3. 차별과 편견에 맞서는 용기 - 정의를 향한 실천
  4. 교육과 의료를 통한 근본적 변화 - 지속 가능한 도움
  5. 2대에 걸친 헌신 - 진정한 사랑의 증명


한국을 선택한 사람들


로제타 셔우드 홀은 단순한 선교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한국을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의 좋은 환경을 뒤로하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한국을 선택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조선에서 가장 소외받고 차별받던 여성들을 선택했습니다. 존재감조차 없었던 그들에게 긍휼한 마음을 품고, 그들만을 위한 병원과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4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잃어도, 딸을 잃어도, 그녀는 한국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죽어서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어둡고 갈 길 모르니 나를 도와주소서"

125년 전 조선 땅에서 하나님께 드린 로제타 선교사의 기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마음에 울림을 줍니다. 어둠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고자 했던 한 여성의 불꽃같은 삶이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감동과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다음 이전